파도와 사투를 벌인 시간들(배멀미를 견디며 보낸 해군장교의 항해 회고록)
1. 동중국해에서 시작된 배멀미와의 첫 만남
사관학교 4학년 때 4개월간 순항훈련을 나갔다. 당시 탑승한 함정은 약 1,500톤급 호위함이었다. 제주도를 지나 동중국해로 접어들자 파도는 거칠어지기 시작했고, 체감상 4~5미터는 족히 되어 보였다.
나는 일주일 동안 거의 침대에서만 지냈다. 속은 계속 울렁거렸고 머리는 깨질 듯 아팠다. 훈련과 임무를 수행해야 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때는 ‘내가 과연 이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일주일쯤 지나자 조금씩 몸이 적응하기 시작했다. 바다에 오래 노출되면 어느 정도 견딜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처음 경험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정박지에서 3박 4일 정도 머문 뒤 다시 출항하면 상황은 달라졌다. 출항 후 2~3일 동안은 다시 머리가 아프고 속이 불편했다. 그러다가 며칠이 지나면 또다시 적응했다.
나보다 배멀미가 심한 동기들도 많았다. 배멀미를 견디지 못해 해병대로 진로를 바꾸거나, 항해과에서 1년 정도 함정을 탄 뒤 특과로 전과한 동기들도 있었다. 그만큼 배멀미는 해군 장교 후보생들에게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라 진로를 바꾸게 할 만큼 큰 문제였다.
2. 함정 생활 속에서 조금씩 익숙해진 멀미
해군장교로 임관한 뒤에도 배멀미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함정에 오래 머물면 어느 정도 적응했지만, 정박했다가 출항할 때면 어김없이 하루 이틀은 머리가 아프고 속이 불편했다.
중위 때 초계함 통신관으로 근무하면서 독도경비 임무를 수행한 적이 있다. 어느 날 날씨가 나빠져 동해 쪽으로 피항 항해를 하게 되었다. 한밤중에 함교에서 네 시간 동안 당직사관으로 근무하며 거센 파도와 맞서야 했다. 함정은 계속 흔들렸고, 긴장한 상태로 파도의 움직임을 지켜보며 당직을 섰다.
당직을 마치고 침실로 내려오는데 갑자기 유증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 순간 속이 뒤집히면서 바로 구토를 했다. 해군장교 생활을 시작한 뒤 처음으로 토한 순간이었다.
당시에는 배멀미를 한다는 사실이 부끄럽기도 했다. 함정에서는 누구나 힘들었지만, 장교라면 어떻게든 참고 버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몸이 아무리 힘들어도 대원들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3. 폭풍 속에서 경비임무를 수행하다
대위 때 또 다른 초계함에서 포술장으로 근무했다. 흑산도 서쪽 해상에서 3주 동안 경비임무를 수행했는데, 그 기간 동안 폭풍을 세 번이나 만났다.
당시 파도가 4~5미터에 이르면 보통 황천 2급을 설정하고 초계함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파도가 5미터 이상 치는데도 황천 2급이 설정되지 않았다. 함장은 목포방어사령부 지통실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황천을 올려 달라고 요청했지만, 지통실장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피항하지 못한 채 높은 파도와 싸우며 하루를 보내야 했다. 함교에서 당직을 서고 있으면 옆으로 지나가는 상선이 파도에 가려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경비구역을 지키기 위해 변침할 때마다 함정이 옆으로 크게 기울었고, 순간적으로 배가 뒤집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들었다.
파도가 배를 덮칠 때면 몸은 본능적으로 긴장했다. 손으로 난간을 단단히 붙잡고 발을 넓게 벌린 채 버텼다. 그때의 파도는 단순히 배를 흔드는 것이 아니었다. 배 전체를 들어 올렸다가 내리꽂고, 사람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을 이리저리 내던졌다.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맡은 경비구역을 지켜야 했다. 무서웠지만 임무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폭풍이 지나가고 바다가 잔잔해진 뒤에야 비로소 ‘오늘도 무사히 넘겼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4. 고속정 정장으로 겪은 거친 항해
욕지도에서 고속정 정장으로 근무할 때는 초계함을 탈 때보다 배멀미가 덜했다. 고속정은 항해시간이 짧았고, 기상이 좋지 않으면 아예 출항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하지만 때로는 날씨가 나빠도 함대의 지시에 따라 이동해야 했다. 어느 겨울날, 부산 남쪽 해상의 파고가 3미터 이상이라는 예보가 있었다. 욕지도에서 부산으로 이동해야 했지만, 파도가 높아 계획이 연기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함대에서는 예정대로 이동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욕지도를 출항해 매물도까지는 북동풍의 영향과 주변 섬들 덕분에 비교적 파도가 잔잔했다. 시야는 좋았고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하지만 매물도 바깥쪽 외해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멀리서부터 하얀 백파가 눈에 들어왔다. 높은 파도가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매물도를 지나자 3미터가 넘는 파도가 함수에서 밀려왔다. 파도를 정면으로 받으면 속력을 높일 수 없었다. 양쪽 엔진을 최저로 운용해도 함정은 큰 파도에 올라갔다가 자유낙하하듯 떨어졌다. 마치 놀이공원의 바이킹을 타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결국 한쪽 엔진만 사용했지만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1~2분마다 한 번씩 거대한 파도가 함정을 덮쳤고, 바닷물이 고속정 전체를 휩쓸었다. 외부로 나가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평소라면 한 시간 반이면 도착할 거리를 7노트 정도의 속력으로 무려 7시간 가까이 걸려야 했다.
항해를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지나자 서 있거나 앉아 있는 대원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정장인 나와 부장, 조타수, 기관조종수, 견시, 전탐사, 기관당직자 등 일부 인원만 각자의 위치를 지키고 있었고, 나머지 20여 명의 대원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다른 대원들은 중간중간 교대할 수 있었지만, 정장인 나는 끝까지 자리를 지켜야 했다. 부산에 도착했을 때는 온몸의 힘이 빠져 녹초가 되어 있었다. 이런 항해를 몇 차례 겪으면서 고속정이 빠른 배이기는 하지만, 거친 바다 앞에서는 결코 만만한 배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다.
5. 구조 임무와 함께 찾아온 두 번째 구토
소령 시절 포항에서 고속정 편대장으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동해는 날씨가 나빠지면 파도가 크게 일기 때문에 고속정이 출항하지 않는 날이 많았다. 당시 고속정 편대는 격일제로 야간경비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날은 경비를 나가지 않는 날이었고 날씨도 좋지 않았다. 출항할 일이 없을 것으로 생각해 그동안 하지 못했던 장교들과의 회식을 했다. 몸 상태가 아주 좋지는 않았지만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았다. 밤 10시쯤 관사로 돌아와 자정 무렵 잠이 들었다.
새벽 4시쯤 잠결에 휴대전화가 계속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전화를 받아보니 함대에서 즉시 출항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는 내용이었다. 날씨가 나빠 고속정이 나갈 수 없을 것 같았기에 이상한 생각이 들어 함대 상황실에 직접 확인했다.
포항 동쪽 해상에서 어선이 침몰했고, 해경이 이미 실종자 수색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해경 경비정도 수색에 나선 상황에서 우리 해군 역시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우리는 고속정 두 척을 출항시켰다.
포항 내항에서는 파도가 높지 않았지만 외해로 나갈수록 파도는 점점 거칠어졌다. 수색구역에 도착했을 때는 파도가 3미터를 훨씬 넘었다. 전날 마신 술이 아직 완전히 깨지 않은 데다 몸 상태도 좋지 않았다. 속이 뒤집히기 시작하더니 결국 전날 먹은 것들을 모두 토하고 말았다. 몇 차례나 구토를 했다.
그것은 해군생활 중 두 번째로 토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날은 쉴 수도, 돌아갈 수도 없었다. 실종자를 찾기 위해 하루 종일 거친 파도 위에서 수색을 계속해야 했다. 몸은 한없이 힘들었지만, 누군가는 그 바다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버텼다.
해군을 떠난 지 어느덧 10여 년이 지났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절에는 젊었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던 것인지, 군인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던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당시의 나는 배멀미와 두려움, 피로와 싸우면서도 맡은 임무를 끝까지 수행했다는 사실이다.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가 같은 생활을 하라고 한다면 자신 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거친 파도 속에서 침대를 지키던 시간, 함교에서 밤새 파도를 바라보던 순간, 고속정이 파도에 올라갔다가 내리꽂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배멀미는 나에게 약함의 상징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다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고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준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임무를 이어가게 했던, 해군장교 시절의 고통스럽지만 소중한 훈장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