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구함에서 보낸 다섯 달(오발사고, 태풍, 짧은 함정생활)
해군 장교 시절 두 번째 근무지는 동해항에 있던 백구함(PGM)이었다. 내가 근무한 백구함은 스탠더드 미사일 4기와 3인치 함포, 40mm 기관포를 장착한 미사일 고속함이었다. 가스터빈 엔진 4대와 가변피치 스크루를 사용했고, 선체는 알루미늄으로 건조되어 매우 가벼운 함정이었다. 소령 함장을 중심으로 장교 4명과 25명 안팎의 부사관과 병이 승조원으로 근무했다. 지금은 함정이 퇴역하여 없는 함정이다.
진해에서 수리 중이던 초계함의 통신관 임무를 마치고 동해의 백구함으로 부임했을 때, 나에게 주어진 직책은 포술장이었다. 포술장은 함정의 함포와 사격 임무를 책임지는 직책이었다. 그러나 백구함 생활은 시작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1. 첫날부터 맡게 된 오발 사고의 책임
내가 백구함에 부임한 날은 마침 해상 대공사격이 예정되어 있었다. 함장은 처음 부임했으니 전임 포술장이 사격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인계를 잘 받으라고 했다. 당시 FF 1척과 PGM 3척 등 네 척의 함정이 함께 종렬진을 이루어 사격구역으로 이동했다.
사격구역에 도착한 뒤 대공표적을 예인하는 항공기가 확인되었다는 통신이 들렸다. 그런데 전임 포술장이 무언가를 지시하자 3인치 함포에서 포탄 한 발이 발사되었다. 내가 보기에도 발사되어서는 안 되는 순간이었다. 발사된 포탄은 앞서 가던 FF 함정의 함수 가까이에 떨어졌고, 바다 위로 물기둥이 솟아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날은 다른 상황까지 겹쳐 대공사격을 진행하지 못하고 입항했다. 그런데 전임 포술장은 이미 전출 명령을 받은 상태라 곧바로 떠났고, 함장은 나에게 오발 사고의 원인을 확인해 신속히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사고는 전임자가 일으켰지만, 책임을 확인하고 보고해야 하는 사람은 새로 부임한 나였다.
나는 병기부사관들과 함께 원인을 조사했다. 하지만 부임 첫날이라 함포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병기사들의 설명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설명을 이해하기 위해 관련 내용을 공부하고 작동 원리를 확인한 뒤 함장에게 보고했지만, 함장은 그것이 정확한 오발 원인이 아니라며 다시 조사하라고 했다.
이후 병기사들과 여러 차례 회의를 하고 직접 함포를 작동해 보면서 하나씩 확인해 나갔다. 하루 이틀이 지나자 병기장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당시 한 병기사가 포술장의 지시와 다르게 장비를 조작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병기사들의 말을 믿고 보고했지만, 그 말이 정확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큰 당혹감을 느꼈다. 결국 백구함에서의 첫 출발은 오발 사고와 함께 시작되었고, 그 후 함장은 나를 못마땅하게 대했다. 포술장으로서의 생활은 처음부터 부담과 긴장 속에서 이어졌다.
2. 태풍과 고장 속에서 버틴 백구함
백구함은 선체가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져 매우 가벼웠기 때문에 태풍이 접근하면 동해에 머물 수 없었다. 태풍이 온다는 예보가 있던 어느 해 가을, 우리는 동해에서 진해로 이동해 태풍을 피했다. 태풍이 지나간 뒤 다시 동해로 복귀하라는 지시를 받고 진해를 출항했지만, 포항 동쪽 해상에 이르자 태풍의 여파로 너울이 매우 높았다.
가벼운 함정이 높은 파도를 옆으로 받으니 배는 심하게 흔들렸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가스터빈 엔진이 꺼지는 일이 발생했다. 추진력을 잃은 함정이 파도를 옆으로 받자 마치 오뚝이처럼 좌우로 사정없이 흔들렸다. 엔진을 되살리는 데 한 시간가량 걸렸는데, 그 시간 동안 함정이 침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수없이 느꼈다. 다행히 엔진을 재가동하는 데 성공했고, 우리는 무사히 동해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백구함에는 기관장 대위가 있었는데, 기관을 가동할 때마다 소화기를 들고 엔진 옆에 서 있었다. 가스터빈의 열기가 기관실로 전달되어 가끔 화재가 발생했기 때문에, 불이 나면 즉시 진화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백구함은 오래된 함정이라 정지해도 완전히 멈춰 있지 못하고 조금씩 앞이나 뒤로 움직였다. 가변피치가 완전히 0으로 맞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출항할 때는 축을 연결하는 즉시 홋줄을 풀고 출항해야 했고, 입항할 때는 홋줄 하나만 부두에 연결되면 곧바로 엔진을 정지해야 했다. 이후 승조원들이 직접 홋줄을 당겨 함정을 부두에 붙였다. 장비가 불편한 만큼 대원들의 고생도 컸지만, 모두가 맡은 자리에서 묵묵히 임무를 수행했다.
3. 짧았지만 잊을 수 없었던 백구함 생활
백구함은 평소 동해항에 정박해 있다가 상황이 발생하면 즉시 출항해 작전을 수행하는 형태로 운용되었다. 훈련이나 작전이 없을 때는 부두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다. 당시 오후 3시부터 체력단련 시간이 있었는데, 우리 함정은 주로 축구를 했다.
나도 대원들과 함께 축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승조원들과 가까워졌다. 개인적으로 뛰어난 선수는 많지 않았지만, 꾸준히 함께 발을 맞추다 보니 팀워크가 매우 좋아졌다. 대령이 지휘하는 1급함과 축구 시합을 해도 쉽게 지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운동을 통해 만들어진 단결력은 함정 생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백구함에 전입한 지 5개월 만에 다른 함정으로 전출하게 되었다. 백구함이 관리대기 형태로 운용되었기 때문이다. 관리대기란 평소에는 최소 인원만 남겨 정비와 유지 업무를 수행하고, 유사시 승조원을 보강해 정상적으로 운용하는 체제였다. 결국 장교 1명과 5~6명의 부사관과 병만 남고 나머지 승조원들은 다른 함정으로 발령받았다.
돌이켜보면 백구함에서 보낸 시간은 고작 다섯 달이었다. 하지만 첫날의 오발 사고, 태풍 속 엔진 고장, 위험한 항해와 어려운 장비 운용, 그리고 대원들과 함께 땀 흘렸던 축구 시간까지 많은 기억이 남아 있다. 짧았지만 백구함은 나에게 장비와 작전뿐 아니라, 책임의 무게와 승조원 간 신뢰의 중요성을 가르쳐 준 특별한 함정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