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원일 제독'을 읽고(성장, 해방병단에서 해군으로, 전쟁 지휘와 기반구축)
내가 해군본부에 근무할 당시 누군가 나에게 '손원일 제독'이라는 책을 선물한 것을 읽고 쓴 독후감 내용이다. 이 책은 오진근, 임성채가 지은 책이다.
1. 손정도 목사의 독립운동과 손원일의 성장
손원일 제독의 정신적 뿌리는 독립운동가이자 목사였던 부친 손정도에게서 찾을 수 있다. 손정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로, 임시의정원 부의장과 의장을 역임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당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임시헌장을 제정하는 과정에 참여했으며, 이후 김구·여운형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를 조직해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 조달에도 힘썼다. 그는 상하이에서의 활동을 마친 뒤 만주 지린으로 옮겨 동포 사회를 돌보다가 1931년 세상을 떠났다. 1996년에는 중국에서 유해가 봉환되어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으며, 아들 손원일의 묘와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다.
손원일은 어린 시절 눈병을 앓은 뒤 평생 도수 높은 안경을 사용했으며, 부친의 영향을 받아 민족과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안창호와의 만남을 통해 ‘무실역행’의 정신을 배웠고, 이를 해군 건설과 국가 발전의 기본 자세로 삼았다.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21일에는 민명증·김영철·정긍모·한갑수 등과 함께 해사대를 조직했다. 당시 여러 군사단체가 난립하는 상황에서 손원일은 해군 창설의 필요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독자적인 해군 건설을 추진했다. 이후 좌경화된 건국준비위원회를 탈퇴하고 조직과 재정을 정비해 해방병단 창설을 주도했다.
2. 해방병단에서 대한민국 해군으로
1945년 11월 11일, 손원일과 해사대원들은 옛 충훈부 건물에서 해방병단 창설식을 거행했다. 이는 조선 수군이 폐지된 지 51년 만에 우리 땅에 해군이 다시 탄생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해방병단은 대한민국 해군의 모체가 되었으며, 창설 당시 70명이던 인원 가운데 최종적으로 37명이 남아 해군 건설의 기초를 닦았다.
1946년 1월 해방병단은 국방사령부 예하로 편입되었고, 손원일은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해방병단은 조선해안경비대로 개칭되었으며, 총사령부는 진해에서 서울로 이전했다. 손원일은 부령, 대령, 준장으로 차례로 진급하면서 해군의 제도와 조직을 정비했다. 그는 인사기록에서 원적과 본적을 삭제하고 도별 차별을 없애려 했으며, 출신 배경보다 능력과 헌신을 중시하는 인사 원칙을 세웠다.
해군 교육체계도 손원일의 주요 업적이었다. 해사 1기생은 교육기간이 1년으로 단축된 상태에서 1946년 12월 15일 임관했으며, 이후 해군사관학교의 교육기간과 제도가 점차 정착되었다. 그는 전쟁 중에도 생도 교육을 중단하지 않고 장교 양성에 힘썼다. 또한 아내 홍은혜와 함께 ‘바다로 가자’를 비롯한 군가를 만들며 해군의 정신과 전통을 확립했다. LCI 함정인 ‘서울정’과 ‘진주정’을 인수하고, 여러 함정의 도입과 편대훈련을 추진해 해군의 작전능력을 키웠다.
손원일은 해군작전과 연계된 지상전투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해병대 창설도 적극 지원했다. 초기 반대에도 불구하고 해군기지 경비와 상륙·지상전투를 담당하는 해병대 창설안을 관철시켰으며, 해병대는 이후 대한민국 국군의 핵심 전력으로 성장했다. 그는 공군 창설을 지원하고 군종제도 도입에도 앞장서는 등 군 전체의 균형 있는 발전을 추구했다.
3. 전쟁 속 지휘와 해군 발전을 위한 외교·기술 기반 구축
6·25전쟁이 발발하자 손원일은 해군 지휘관으로서 해상작전과 항만 방어, 병력 수송, 피란민 철수에 힘썼다. 그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고 작전 수행을 지원했으며, 포로와 부역자를 함부로 처벌하지 말고 정해진 절차에 따라 처리하라는 원칙을 강조했다. 또한 동·서해에서 활동하는 함정들에게 가능한 한 많은 피란민을 태워 철수시키도록 지시했다. 이는 군사적 임무뿐 아니라 민간인 보호를 중시한 그의 지휘철학을 보여준다.
전쟁 이후 손원일은 한국 해군의 전력 증강을 위해 미국과 적극적으로 협상했다. 해군 모금과 정부 지원금으로 함정 구매를 추진했고, 미국 해군 장성들과 쌓은 신뢰를 바탕으로 호위구축함·고속수송함·경비함·상륙함·소해함 등을 도입했다. 그 결과 정부 수립 이후 정전까지 한국 해군은 자체 건조와 외국 함정 인수를 합쳐 38척의 함정을 확보했다. 이후에도 알레이 버크 제독 등과의 협력은 한국 해군이 구축함과 각종 전투함을 도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손원일은 해군의 과학기술 발전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951년 해군기술연구소와 해군과학연구소를 설립해 원자력과 군사기술 연구의 기반을 마련했으며, 군악대와 군종제도를 정비해 장병들의 정신전력과 문화적 결속을 강화했다. 그의 활동은 단순히 해군이라는 조직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교육·인사·군수·외교·과학기술·정신전력까지 아우르는 종합적인 국군 건설로 이어졌다. 손원일 제독은 해군 창설의 주역이자 대한민국 해군의 기틀을 세운 개척자로 평가받으며, 평생 국가와 해군을 위해 헌신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